잡학다식/역사와 이야기

[한국사] 삼전도굴욕 - 청나라에게 무릎꿇다, 삼배구고두례

토끼와잡학다식 2020. 2. 6. 16: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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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16, 광해군 재위 당시

여진족이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나간다.

 

광해군

 

그 후, 광해를 내쫓고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조선의 16대왕

인조

 

 

후금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광해와 다르게,

인조는 금나라를 싫어하였다.

 

후금을 배척하는 ‘향명배금’정책을 발표하고

후금의 앙숙인 명나라를 도와준다.

 

이에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평양을 거쳐 평산으로 들이 닥쳤다.

그게 바로 “정묘호란(1627)”

 

 

이 사실을 알게된 인조와 제신들은

이미 강화도로 도망가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내신들 사이에서는

최명길 등의 주화론이 우세하여

청과 타협하길 원하였다.

 

최명길

 

이에 후금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우리를 형님으로 모시면 전쟁을 그만 하겠다

제안을 수락한 조선은

후금의 감시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청의 황제

 

정묘호란이 끝난 후,

후금은 무리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식량을 내어 줄 것을 요구하는가 하면

명을 정벌할 군사를 요구하기도 하였다.

 

 

후금은 만리장성을 넘어

북경 부근을 공격하면서

조선에게 다시 한번 제안을 한다.

“형제의 나라가 아닌, 군신의 나라로 바꿀 것을..”

이는 조선에게

굴욕적인 요구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청의 요구를 거절하고

끝까지 싸우자는 척화론

대세를 이루었고

조선은 이 제안을 묵살했다.

 

척화파와 주화파

 

1636년 후금은,

스스로 황제라 칭하고

국호를 으로 바꾸었다.

 

그 후 청의 태종은

“척화론자들을 잡아 보내라 그렇치 않으면 조선을 치겠다”

라고 위협하였으나

다시한번 제안을 거절 하였다.

 

 

그리하여 같은해 121,

병력 10만을 이끌고

조선을 침략했다.

 

병자호란

 

대신들과 빈들을 먼저 강화도로 보내고

뒤이어 인조도 세자와 강화도로 향했다.

 

그러나 이미 청군이 들어와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히게 된다.

성내에는 식량도 없었고,

상황은 시간이 흐를수록

조선에 불리해져 갔다.

 

남한산성 내에서는

주화파척화파의 대립이 계속 되었고,

45일 후 결국 조선은 항복하게 된다.

 

 

인조 15(1937),

인조는 세자와 함께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렸는데..

이것이 역사상 가장 최악의 굴욕인

삼전도굴욕

“삼배구고두례”

 

 

 

후에 청군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잡고,

김상헌등 척화파의 주요 인물들을 묶어

심양으로 돌아감으로써

병자호란은 끝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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