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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학다식/역사와 이야기 4

한국전쟁(6.25) - 북한의 남침, 전쟁의 비극

한 번은 할머니께서 6.25 전쟁에 대해 얘기해주셨는데, 귀 기울여 듣지 않고 넘기곤 하였다. 2020년도인 지금,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던 그분들을 기억합니다. 한국전쟁은 반공주의 미국과 공산주의 소련의 냉전적인 갈등이 최고조로 전환되어, 실제 전쟁으로 이어진 가장 대표적인 사례로, 총 10개국 이상이 참전한 2차 세계대전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국제전이다. 1945년 0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에서 일본이 패망한 후, 우리나라는 광복을 맞이한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남쪽은 대한민국, 북쪽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두 개의 단독정부가 수립된다. 두 국가가 일본의 항복을 받아내고 물러 날 줄 알았던 우리에게는 큰 충격이다. 이후 이념적 대립과 냉전은 고조되었고, 1950년 06월 25일 새벽 4시 북..

[한국사] 세조 수양대군 - 단종의 왕자리를 빼앗은 사건, 계유정난

1450년, 세종이 죽은 후 왕실은 혼란 속으로 빠져든다. 그 후 세종의 장남 문종(1450~1452)이 재위 2년 만에 타계하자, 문종의 외아들이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다. 그가 바로 6대 임금 "단종"(1452~1455) 즉위 당시 단종은, 누구보다 외로운 상태였다. 어머니 현덕왕후는 단종을 낳은 후 죽었고, 할머니 소헌왕후도 즉위 전 타계하였다. 이러한 상황을 예감한 문종은, 죽기 전 영의정 황보인과 우의정 김종서, 좌의정 남지 등에게 어린 단종을 부탁하고 눈을 감았다. 이에 따라 황보인과 김종서가 실권을 잡고 모든 정사를 좌지우지하을 뿐만 아니라 세조 수양대군을 견제하였다.. 이 때문에 재위 당시 단종은 거의 허수아비 신세였다. 선왕의 유지를 받아 나이 어린 단종을 보필한다는 나름대로의 명분이었..

[세계사] 태평양 전쟁의 판도를 바꾼, 미드웨이 해전

1941년말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후, 일본과 대적할 수 있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일본의 유일한 두려움이었던 소련은, 일본이 건드리지 않는 한 일본에 대해 적대 자세를 취하지 않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당시 대부분의 제해권은 일본에게 있었고, 연합군은 방어에만 급급한 상황이었다. 또한 미국은 진주만 공습으로 인하여 정비가 덜 된 상황이였고, 태평양을 가로질러 날아 올 수 있는 대형 폭격기도 없었다. 그 당시의 기술로는 이러한 먼 거리를 날아 오기란 불가능에 가까웠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둘리틀 공습이 감행되었고, 일본은 충격의 도가니에 빠졌다. 한번도 외국군에게 본토공격을 받아 본적이 없었던 일본은, 외해의 방어선을 더 멀리 구축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진다. 그 당시 미국의 최전방은 미드웨이에 있었고, 야..

[한국사] 삼전도굴욕 - 청나라에게 무릎꿇다, 삼배구고두례

1616년, 광해군 재위 당시 여진족이 만주에서 건국한 후금은 “광해군”의 적절한 외교정책으로 큰 마찰이 없이 지나간다. 그 후, 광해를 내쫓고 인조반정으로 왕위를 차지한 조선의 16대왕 “인조” 후금과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광해와 다르게, 인조는 금나라를 싫어하였다. 후금을 배척하는 ‘향명배금’정책을 발표하고 후금의 앙숙인 명나라를 도와준다. 이에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복하여 후환을 없앨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후금의 태종은 군사 3만여 명을 이끌고 평양을 거쳐 평산으로 들이 닥쳤다. 그게 바로 “정묘호란(1627)” 이 사실을 알게된 인조와 제신들은 이미 강화도로 도망가 있던 상황이었다. 당시 내신들 사이에서는 최명길 등의 주화론이 우세하여 청과 타협하길 원하였다. 이에 후금은 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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